요즈음 어떤 방송국의 주말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데 그 드라마의 제목이 ‘○○○○ 각자도생’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제각기 스스로 살아 나아갈 바를 도모하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이 죽든 말든 전혀 개의치 말고, 젖 먹던 힘까지 쏟아서 자기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각자도생의 사례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594년 선조실록에는 임진왜란의 환란 와중에서 백성들이 각자 알아서 살아가야 한다고 적어 놓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왕실 사람들과 신하들에게 각자도생의 죄를 물었다.
이후 1809년 순조 때 닥친 흉년기에 백성들의 처참한 삶이 각자도생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1866년 고종 시절 경상도에서 조창(漕倉) 운반선의 침몰사고와 관련하여 각자도생이란 말이 기록되었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각자도생은 외국의 침략이나 자연재해, 그리고 사고 등으로 비롯된 절체절명의 위기 및 혼란의 상황에서 주로 회자된다.
2014년 ‘세월호 사태’ 가 터지자, SNS상에서 ‘세월호 사태’를 풍자한 말이 회자되었다. 그것은 ‘OECD 대한민국, 각자도생 불신지옥’이었다.
이 말을 굳이 풀어보자면, 각자도생은 곧 불신지옥으로 이르다는 것이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에 공감을 표하기 위하여 수많은 댓글을 달았다.
엄혹한 위기 상황에 직면할수록, 많은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유혹에 빠져버리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살아남기 보다는 오히려 모두 공멸하기가 매우 쉬워진다.
설사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 곳이 지옥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수많은 철새들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수천,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서 자신들의 서식지를 옮겨 다닌다.
그럴 때마다 철새들은 항상 무리를 지어 날아간다.
제멋대로 떼를 지어 날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철새들은 언제나 일정한 대열을 유지하면서 장거리 비행을 한다.
그 여정은 죽음의 공포에 맞서야할 만큼 혹독하다. 매서운 추위가 철새들의 살을 얼어붙게 하고,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는 철새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또한 독수리 등 천적들은 호시탐탐 철새들의 목숨을 노린다.
그럴수록 모든 철새들은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래야지만 철새들은 천적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할 수 있고, 강추위와 폭풍우를 견디어 내면서 훨씬 손쉽게 수만 킬로미터를 무사히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철새들은 결코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까지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주는 교훈도 그렇고, 역사가 일깨워주는 가르침도 똑같다. 각자도생은 최선은 커녕 차선도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각자도생은 타인과의 관계를 절연함으로써 종국적으로 공동체의 공멸로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일컫는 인간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줄곧 타인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생존한다.
이 관계가 무너지게 되면, 인간은 사회정치적 죽음뿐만 아니라 고독사(孤獨死)처럼 생물학적 죽음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방치한다면, 사회의 존립마저도 위태롭게 된다, 그래서 현재 우리 사회에는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이를
예방하고 관리하고 있다. 이처럼 국가는 사회 구성원들을 각자도생의 나락으로 밀어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사회구성원들에게 ‘공존동생(共存同生)’의 기반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곧 국가번영의 요체이고 국가안보의 초석이다. 지금 정부는 물론 미래의 정부에게도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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